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글곳간 215

김장호 시 '운길산'

雲吉山 김장호 고향이 있는 사람이거나 없는 사람이거나 팔월 보름, 추석이면 천막을 여기 칠 일이다. 水鐘寺 옆구리 은행나무가지 사이로 은가루를 뿌린 듯 온통 달빛 아래 반짝이는 물살 무늬. 內雪嶽을 씻어 내린 북한강물이나 영월 평창 두메산골에서 흘러온 남한강물이 모두 합수하여 여기 양수대란 춤추거든. 이 가을 걷어 들일 한알 알곡이야 마음밭에 없더라도 가슴을 쓰다듬을 일이다 생명 있음의 고마움으로, 어버이 태워주신 고마움으로, 예까지 날 실어올려다 준 다리 성함의 고마움으로.

김장호 시 '희양산'

희양산 김장호 알몸을 햇살 아래 드러내어 놓아도 이름 자대로 엿볼 눈이 없구나 후미진 두메 소백산맥 안 고샅 은티재 너머 지름티재를 넘어 치맛자락 주름주름 홍문정 뒷골짜기 우러르면 눈이 부시다 휘황한 속살. 차갑다 부드러운가 손을 얹으면 고도감으로 발밑부터 떨린다. 손가락 끝으로 잡아라 바위눈금 끌어라 뒤꿈치. 광막한 테라스에 올라서면 두 날개 펴고 산줄기가 난다. 발아래 아스라이 솟구치는 바위벼랑. 문경에서 점촌에서 와야리로 와야지 도티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정 눈이 부시거든 오봉정으로 숨어들 일이다. 용초골 시냇물에 몸을 담그면 살구꽃 복사꽃이 제 물에 진다.

김장호 시 '월악산'

월악산 김장호 미륵리(彌勒里) 미륵불상 자리에 서서 보면 북쪽하늘 은밀한 틈서리로 치닫는 군단(軍團) 단양가도(丹陽街道) 한수(寒水) 물가에서 돌아보면 말발굽을 울리는 용의 수레. 밤이면 밤대로 서천으로 번득한 달빛을 되받아서는 난리도 영너머로만 스쳐간다는 덕주꼴 안골짝을 용궁으로 떠올린다. 신륵사 뒤 고샅을 땀으로 헤쳐들 떄는 바위벼랑 아스라이 트이는 허공이더니, 발아래 송계마을로 소크라지면서는 지축(地軸)으로 빠진다. 이런 후미진 곳에 이런 산이 있었다니.. 모를 사람이나 몰랐다 뿐, 달래강으로 남한강으로 천지가 개벽하면서부터 그림자는 흘러 실려 내렸다네..

김장호 시 '설악산'

雪嶽山 김장호 이 산은 오르기가 좀 까다롭다 짜임새 때문이다. 밋밋한 육산과 달라 섯돌고 감돌아 외가닥으로는 길이 열리지 않는다 서북주능을 기둥삼아 화채 공룡 갈래지능 두어개면 됐지 굽이마다 홀쳐내고 틀터감아 수렴동으로 들어서도 벽 천불동으로 밀어붙여도 사면은 막혔다. 쳐다보면 설레고 내다보면 어질한 곱살맞은 끌질, 치맛자락 추스려, 어느구석 마음편한 너덜이라곤 없다. 비바람에 삭아내린 바위쯤 암벽에서 떨어져나가 더 아름다운, 아름다운 것 앞에 실수만 되풀이하는 사내처럼, 자꾸 내 몰골이 발길에 채이는 설악산

김장호 시 '벼랑에 서서'

벼랑에 서서 김장호 제가 장미인 줄도 모르고 장미는 핀다. 높이에서 섬뜩한 높이에서 산은 제 이름을 모른다. 말 있음의 고마움에 잠을 설치는 시인이여, 개천 바닥을 뒤져 한 알 금싸라기를 주워내는 시인이여, 사태진 살갗으로 눈얼음을 피처럼 철철 흘리는 벼랑에 서서, 말이 부질없구나 시 또한 부질없다. 뛰어내릴 일,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버리고 깔리어 피어날 일이다. 북한산 숨은벽능선

김장호 시 '축령산'

祝靈山 김장호 살구재를 넘거든 비령이 잣나무숲을 빠져 등성이로 붙어라. 비로소 마루턱이 트이면 서천으로 남이(南怡)바위 북한산 도봉산에서도 보이던 하늘에다 대어놓고 괴기한 주먹질. 산 첩첩 물 첩첩에 발아래 불당골. 한강을 예서 보면 서북으로 누었는데 수동천은 어쩌자고 동남으로 흐른다. 서리산으로 북을 막고 건너다보는 쾌라리고개 목 좌우로 팔을 벌리는 천마산과 철마산. 빠질 길이 묘연하다. 누가 일러 경기도의 히말라야 옴 마니 빼내 흠 셰르파의 주문(呪文) 대신 나무꾼의 회심곡이 등산화 끈을 풀게 한다

김장호 시 '북한산'

北漢山 김장호 어버이를 여의고 나는 내게 지붕이 없어졌다고 느꼈다. 분가를 하고서는 더구나 내가 외톨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며 돌아보며 됨됨이를 탓하면서 골목마다 책갈피마다 아, 신열로 달아오르던 나날, 문득 머리 위에 덮여오는 지붕,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동짓달 산그늘을 시나브로 흔들리는 우듬지의 바람으로 녹슨 숲을 헤치고 손톱밑을 헤집고 하냥 기어오른 마루턱 어쩌자고 벼랑가에 잠드는 나를 만났다. 도시 어디를 헤매다가 이제 오느냐고 그제가 눈을 비비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치는 산이 있었다. 北漢山.

법정스님의 짧은 주례사

[쉼터] 법정스님의 짧은 주례사 2002년 6월 초 서강대 법학과 왕상한 교수와 KBS 변우영 아나운서의 결혼식. 20여 년 전 했던 법정스님과 왕 교수와의 ‘약속’이 지켜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오늘 이 주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한 법정스님은 이 부부에게 두 가지 ‘숙제’를 냈다. “한 달에 산문집을 2권씩 읽고, 시집 1권을 꼭 읽으십시오.” 두 사람이 매달초 서점에 가서 각각 산문집을 1권씩 고른 뒤 읽고, 서로 바꿔서 다시 한번 읽어보라는 것이다. “다른 이의 삶의 체취가 묻어난 글이 산문이며, 그 글을 읽는 것은 곧 삶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각자 고른 책을 교환해 읽는 것도 서로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 가는 일이지요.” 법정스님은 “같이 고른 1권의 시집은 함께 소리 내서 낭랑한..

향곡 '백두대간 산 삼행시 오제'

白頭大幹 山 三行詩 五題 향곡(鄕谷) 지리산 지리산엔 아픈 역사가 숨어있습니다 이제 한꺼풀씩 벗겨지는 우리의 속내이지요 산마다 골마다 겨레의 숨결이 가득한 곳입니다 속리산 속이 타서 붉더냐 수줍어서 그렇터냐 이름대로 수려쿠나 만화향훈 좋을시고 산정도 다했구나 이게 바로 문장대 소백산 소담한 꽃을 피운 연화봉이여 백만겁 지나도록 피운 꽃내음 산골로 부어내니 폭포수려나 오대산 오대천 돌아가면 맑고도 깊은 산골 대가람 물골물아 선문답을 하려느냐 산냄새 풋풋한 달빛일랑 말이다 설악산 설레설레 걷는 백담계곡은 여유를 부릴만한 곳이고요 악다구니 쓰고 오르는 청봉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만 산천경개에 가슴 벅차서 두고두고 가고싶은 산입니다 설악산 공룡능선

글곳간/자작시 200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