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글곳간/산시(山詩) 46

윤동주 시 '길'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유치환 시 '바위'

바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애련(愛憐)-애정과 연민 *함묵(緘默)-입을 다물고 말을 아니함 *원뢰(遠雷)-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 천관산 바위 ( 2005.10.29)

퇴계 시 '청량산가'

청량산가(淸凉山歌) 퇴계 이황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어주재(漁舟子ㅣ) 알까 하노라. * 魚舟子 : 고기잡는 사람 ※퇴계 같은 대학자도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감추어도 감추어도 그것이 끝내 나 혼자만의 것이 될 수 없거늘 언젠가는 알려지게 마련일진데 안타깝다는 말이다. 그래도 후미지고 후미져 아직도 깊이 숨어있는 산이다. 청량산 (2009.5.23)

송강 시 '망양정에서 동해를 봄'

망양정에서 동해를 봄 松江 鄭澈(1536~1593)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득 노한 고래 누가 놀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은산을 꺾어내어 천지사방에 내리는 듯 오월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 天根去來看未足 快馬登行望陽亭 海外長天天外何 脩鯨駭噴波晦暝 慾折銀山下六合 五月白雪湖爲乎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 망양정(望洋亭)은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에 있다. 이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바다풍광은 아름다워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아왔다. 송강 정철이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관동팔경을 두루 돌아보고 그 감흥을 적은 '관동별곡'에서 망양정을 이와 같이 노래했다. 응봉산에서 내려본 울진 앞바다

이은상 시 '계조암'

계조암 이은상(1903~1982) 계조암 너덜바위 길도 바위 문도 바위 바위 뜰 바위 방에 석불 같은 중을 만나 말없이 마주 섰다가 나도 바위 되니라 ※ 계조암(繼祖菴)이라는 이름은 이 암자에서 수도하면 빨리 도를 깨우치게 될뿐더러, 조사(祖師)라고 일컫는 큰스님들이 계속 배출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실제로 동산, 지각, 봉정, 의상, 원효 등의 고승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한다. 설악산 천불동계곡

김병연 시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김병연(金炳淵. 1807~1863)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 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아가니 물과 물,산과 산 곳곳마다 기기묘묘하구나 松松柏柏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꼿꼿,뾰족뾰족,괴괴한 경개가 하도 기이하여, 사람 신선 신령 부처가 모두 감히 못 믿을 것 같구나 내 평생 금강산을 읊으려 별러왔으나 이제 산을 보니 시는 못쓰고 감탄만 하는구나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疑 平生詩爲金剛惜 及到金剛不敢詩 ※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유행가 가사대로, 죽장에 삿갓 쓰고 산수를 넘나들며해학과 풍자로 한 세상을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며, 세상사를 질펀하게 담아내고 엮어낸 김삿갓의 시 중에서 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