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글곳간/산시(山詩) 46

김장호 시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김장호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그 외로운 봉우리와 하늘로 가야겠다. 묵직한 등산화 한 켤레와 피켈과 바람의 노래와 흔들리는 질긴 자일만 있으면 그만이다. 산허리에 깔리는 장밋빛 노을, 또는 동트는 잿빛 아침만 있으면 된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혹은 거칠게, 혹은 맑게, 내가 싫다고는 말 못 할 그런 목소리로 저 바람 소리가 나를 부른다. 흰구름 떠도는 바람부는 날이면 된다. 그리고 눈보라 속에 오히려 따스한 천막 한동과 발에 맞는 아이젠, 담배 한 가치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떠돌이의 신세로.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곳. 들새가 가는길, 표범이 가는 길을 나도 가야겠다. 껄껄대는 산사나이의 신나는 이야기와 그리고 기..

신경림 시 '산에 대하여'

산에 대하여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 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짓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

김장호 시 '내게는 산이 있다'

내게는 산이 있다 김 장 호 하늬바람에 새떼가 떨어지듯 황량한 하늘가에 나무 한 그루 벗을 것 다 벗어도 거기 눈 감고 의지할 산이 있듯이 내게는 산이 있다. 여우 눈물 짜내는 황홀한 추위 속 가지 끝에 아려오는 겨울맛도 한창이다. 눈이 가닿는 데까지 허옇게 눈 덮여 시퍼런 설계(雪溪), 어둡기 전에 이골을 빠져나야 할텐데 눈에 눈물 눈이 묻어 눈물 땀까지 범벅되어 허우적이며 고꾸라지며 가도 가도 제자리 정신 없구나. 밭은 기침소리 하숙집 골목안 연탄 손수레에 눈발은 흩날리고, 부황기에 절은 보리고개를 이고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고 있는가. 헤드,램프를 켜라 덫은 산에도 있다 허공에도 발밑에도, 아니, 네가 데불고 온 인간이, 간교함이 덫을 만들어 너를 노린다. 이 겨울이 다 하면 방황도 끝나리니, 산을 ..

박두진 시 '청산도'

청 산 도 박 두 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부는 세상에도 벌레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신경림 시 '하산(下山)'

하산(下山) 신경림 언제부턴가 나는 산을 오르며 얻은 온갖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기 시작했다 평생에 걸려 모은 모든 것들을 머리와 모에서 훌훌 털어 버리기 시작했다 쌓은 것은 헐고 판 것은 메웠다 산을 다 내려와 몸도 마음도 텅 비는 날 그날이 어쩌랴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된들 사람살이의 겉과 속을 속속들이 알게 될 그날이 설악산에서

조지훈 시 '산중문답'

산중문답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오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난는 맛을 자네 태고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매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 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

김소월 시 '진달래꽃'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 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1902∼1935 본명 정식(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오산학교과 배재고보를 거쳐 동경상대 중퇴. 오산학교 시절 스승인 김억에게 지도를 받음. 시집으로 『진달래꽃』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