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 '길'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글곳간/산시(山詩) 2005.08.26
유치환 시 '바위' 바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애련(愛憐)-애정과 연민 *함묵(緘默)-입을 다물고 말을 아니함 *원뢰(遠雷)-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 천관산 바위 ( 2005.10.29) 글곳간/산시(山詩) 2005.08.26
신석정 시 '산 산 산' 산 산 산 신석정 지구(地球)엔 돋아난 산(山)이 아름다웁다. 산(山)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山)에는 아무 죄 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더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山)이 되어 보나 하고 기린(麒麟)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산(山) 산(山) 산(山) 신불산에서 ( 2005.10.2 ) 글곳간/산시(山詩) 2005.08.26
퇴계 시 '청량산가' 청량산가(淸凉山歌) 퇴계 이황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마라 어주재(漁舟子ㅣ) 알까 하노라. * 魚舟子 : 고기잡는 사람 ※퇴계 같은 대학자도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감추어도 감추어도 그것이 끝내 나 혼자만의 것이 될 수 없거늘 언젠가는 알려지게 마련일진데 안타깝다는 말이다. 그래도 후미지고 후미져 아직도 깊이 숨어있는 산이다. 청량산 (2009.5.23) 글곳간/산시(山詩) 2005.08.20
송강 시 '망양정에서 동해를 봄' 망양정에서 동해를 봄 松江 鄭澈(1536~1593)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득 노한 고래 누가 놀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은산을 꺾어내어 천지사방에 내리는 듯 오월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 天根去來看未足 快馬登行望陽亭 海外長天天外何 脩鯨駭噴波晦暝 慾折銀山下六合 五月白雪湖爲乎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 망양정(望洋亭)은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에 있다. 이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바다풍광은 아름다워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아왔다. 송강 정철이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관동팔경을 두루 돌아보고 그 감흥을 적은 '관동별곡'에서 망양정을 이와 같이 노래했다. 응봉산에서 내려본 울진 앞바다 글곳간/산시(山詩) 2005.08.20
이은상 시 '계조암' 계조암 이은상(1903~1982) 계조암 너덜바위 길도 바위 문도 바위 바위 뜰 바위 방에 석불 같은 중을 만나 말없이 마주 섰다가 나도 바위 되니라 ※ 계조암(繼祖菴)이라는 이름은 이 암자에서 수도하면 빨리 도를 깨우치게 될뿐더러, 조사(祖師)라고 일컫는 큰스님들이 계속 배출되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실제로 동산, 지각, 봉정, 의상, 원효 등의 고승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한다. 설악산 천불동계곡 글곳간/산시(山詩) 2005.08.18
김병연 시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김병연(金炳淵. 1807~1863) 나는 지금 청산을 찾아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 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아가니 물과 물,산과 산 곳곳마다 기기묘묘하구나 松松柏柏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꼿꼿,뾰족뾰족,괴괴한 경개가 하도 기이하여, 사람 신선 신령 부처가 모두 감히 못 믿을 것 같구나 내 평생 금강산을 읊으려 별러왔으나 이제 산을 보니 시는 못쓰고 감탄만 하는구나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疑 平生詩爲金剛惜 及到金剛不敢詩 ※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유행가 가사대로, 죽장에 삿갓 쓰고 산수를 넘나들며해학과 풍자로 한 세상을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며, 세상사를 질펀하게 담아내고 엮어낸 김삿갓의 시 중에서 산에.. 글곳간/산시(山詩) 2005.08.16
무명씨 시 '나비야 청산 가자' 나비야 청산 가자 무명씨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무거든 꽃에서나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 청구영언 〉에서 글곳간/산시(山詩) 2005.08.09
정완영 시 '夏日山中' 夏日山中 정완영(1919~ ) 산이 좋아 산을 찾아 산속으로 들었더니 풀어진 안개 속에 죽순처럼 오른 산봉 짐지고 재넘는 뻐꾸기 새로 울어 푸르더라 〈 시조집 '이승의 등불'에서 〉 가덕산 억새능선 ( 2005.7.2 ) 글곳간/산시(山詩) 2005.08.04
김장호 시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김장호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그 외로운 봉우리와 하늘로 가야겠다. 묵직한 등산화 한 켤레와 피켈과 바람의 노래와 흔들리는 질긴 자일만 있으면 그만이다. 산허리에 깔리는 장밋빛 노을, 또는 동트는 잿빛 아침만 있으면 된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혹은 거칠게, 혹은 맑게, 내가 싫다고는 말 못 할 그런 목소리로 저 바람 소리가 나를 부른다. 흰구름 떠도는 바람부는 날이면 된다. 그리고 눈보라 속에 오히려 따스한 천막 한동과 발에 맞는 아이젠, 담배 한 가치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떠돌이의 신세로.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곳. 들새가 가는길, 표범이 가는 길을 나도 가야겠다. 껄껄대는 산사나이의 신나는 이야기와 그리고 기.. 글곳간/산시(山詩) 2005.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