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역사와 문화가 있는 풍경/고궁 능묘 산사 76

선정릉 / 조선 성종과 중종 왕릉

선정릉(宣靖陵) 조선 성종과 중종 왕릉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사적 제199호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5-4번지 (2010.1.14) 서울 강남구 빌딩 숲 안에 자리 잡은 선정릉엔 성종(成宗)과 제2계비 정현왕후가 묻힌 선릉(宣陵)과 아들 중종(中宗)이 묻힌 정릉(靖陵)이 있다. 정릉동에 묻힌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과 한자가 다르다. 유네스코가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때 선정릉 같이 비싼 땅에 왕릉을 지금까지 보존한 사실에 감탄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집대성하고, 국정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켜 조선초기 문화를 꽃피운 왕이다. 비록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지만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대로 치적을 남겼다. 성종의 무덤은 들어서면서 보이고, 정현왕후능은 건너편 동북쪽..

정릉 / 태종 이방원에 버림받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능

정릉(貞陵) 태종 이방원에 버림받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능 사적 제208호, 세계문화유산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산 87-16번지 (2010.1.12) 정릉은 정릉동에서도 외진 데 있어서 처음 가는 사람은 지도를 미리 살펴보고 찾아가야 한다. 정릉천 부근 숭덕초등학교에서 아리랑고개 오르는 입구에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康)씨 능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과 방석이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고, 덕수궁 옆 정동에 있었던 정릉도 지금 자리로 이장하면서 능은 대폭 줄어들었다. 지금은 북악 스카이웨이가 위쪽으로 지나고 능은 응달에 자리 잡고 있다. 신덕왕후는 왕후였으면서도 종묘에 200여 년간 배향되지 않았는데, 선조 때 겨우 위치를 확인하고 배향하였다..

미륵사터 / 가장 큰 절터,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

미륵사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 있는 곳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2009.11.8) 금마의 진산인 미륵산 남쪽 넓은 자락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터가 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보았던 미륵사탑을 보기 위해 주룩주룩 늦가을 비를 맞으며 찾아갔다. 10만 평 절터에는 주인 격인 서탑은 해체되어 복원 중이었고, 동탑이 말쑥한 차림으로 서있는데 컴퓨터로 계산하여 복원하였다는데 기계는 도저히 사람의 솜씨를 쫓아갈 수가 없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600~641년) 이룬 절로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파손된 것을 일제가 시멘트로 보강하였고, 2002년부터 해체 복원작업을 시작..

고달사터 / 고려시대 대표걸작 유물이 있는 곳

고달사(高達寺)터 고려시대 대표 걸작 유물이 있는 곳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2009.10.24) 남한강 줄기 따라 원주지역 폐절터를 돌아보고서 찾은 곳이 여주에 있는 고달사터이다. 밭과 풀 숲에 놓여있던 유물들이 이젠 터를 잡아 그 위용을 찾았다. 절터 입구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고목은 단풍으로 물들어 범상치 않은 이름을 가진 고달사 절터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생겼다는 석불대좌는 연꽃무늬가 아름답고, 땅을 박차는 듯한 원종대사 부도비의 귀부는 여전히 우람하고 눈이 부리부리 살아있다. 원감대사 부도로 추정하는 큰 부도는 또한 장중하고도 아름답다. 돌로 깎아 다듬은 것으로 믿기엔 너무도 정교하고, 용이 꿈틀꿈틀 살아서 움직이듯 싱싱한 모습이다. 하나 같이 호방하고 씩씩한 ..

흥법사터 / 밭으로 변한 절터에 옛 영화가 아련하다

흥법사(興法寺)터 밭으로 변한 절터에 옛 영화가 아련하다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2009.10.24) 거돈사 터에서 다시 문막으로 나와 찾아간 흥법사 터는 민가와 밭으로 좁아져, 절터는 작은 집터만큼만 남아있다. 삼층석탑이 없었더라면 가까이 가서도 절터를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창건 기록은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 말 절로 추정하고 있다. 진공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삼층석탑만 덩그러니 있고 절터 석물로 쓰던 몇 점의 석재가 밭에 아무렇게 흩어졌다. 진공대사 부도비는 고려 태조(940년) 때 만든 것이라는데, 당당한 귀부의 모습은 앞서 두 군데 절터에서 보았던 조각 솜씨를 닮았다. 몸에는 연꽃무늬와 卍자가 새겨져 있고, 귀부에 엊혀있는 이수는 요란하여 좀 산만한 느낌이다. 귀신이 다가서다가도 도..

거돈사터 / 산이 감싸고 천년 느티나무가 지킨 절터

거돈사(居頓寺)터 산이 감싸고 천년 느티나무가 지킨 절터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2009.10.24) 법천사터에서 나와 진행하던 길로 가면 거돈사 터로 가는 길이다. 거돈사 가는 길은 심심산골 아름다운 산길이다. 타작한 벼를 길에서 말리고 가지가 늘어지게 감이 달린 토담집이 길가에 자리 잡은 정겨운 마을이다. 산골 도로를 따라 다다른 거돈사 터는 잘 다듬은 석축과 천년 수령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다. 이렇게 큰 나무는 보기조차 힘든데 낮은 산들이 주위를 병풍처럼 감싸고 느티나무와 석탑이 우뚝 서 있다. 금당과 회랑을 두른 모양이 발굴조사를 끝낸 흔적이다. 넓은 공간엔 석축을 군데군데 쌓아 가람 배치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하였다. 앞자리에 자리 잡은 원공국사 부도비(1025년 조성)는 최근에 손질을 하..

법천사터 / 화려한 자취는 홀연하고 빼어난 부도비만 남아

법천사(法泉寺)터 화려한 자취는 홀연하고 빼어난 부도비만 남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2009.10.24) 가을 단풍이 절정이라 모두 길을 나섰는지 도로는 차량으로 가득 찼다. 고려 때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폐절이 된 터를 찾아 남한강 줄기 따라나선 첫 번째 목적지는 원주 법천사터이다. 문막나들목을 나와 부론 가는 길은 가을걷이는 끝났지만 날씨가 따사롭고 마음이 푸근하다. 절 입구로 들어서니 절터는 발굴 목적으로 파란색 비닐로 덮어 두어서 주변이 어수선하다. 천년 절터를 지킨 느티나무는 속이 다 비었으나 세월의 연륜을 담아 굳굳하다. 절터 정비공사를 하고 있는 옆을 지나 몇 발자국 오르니 산기슭 한편에 지광국사부도비가 우뚝하다. 천년(1085년 세움)을 넘은 지광국사 현모 탑비는 당당하고 화려하다...

융건릉 / 효심으로 이룬 왕릉

융건릉(隆健陵) 효심으로 이룬 왕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2009.8.30) 결혼 전 데이트 하러 수원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찾아갔던 시골길이었던 융건릉이었다. 융건릉은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장조와 경의왕후를 합장해 모신 융릉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 합장릉인 건릉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사도세자의 한 맺힌 죽음을 목격한 정조가 아버지를 다시 복권시키기 위해 눈물겨운 효심으로 일궈낸 터가 바로 이곳이다.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 일컬을 정도로 훌륭한 정치를 펼친 왕이었다. 경기도 남양주 배봉산 기슭에 모신 사도세자를 복권시켜 이곳에 모시고 자주 능참길에 올랐다. 정성어린 효심을 본받을 일이다. 융건릉 문을 들어서면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이고, 왕릉에는 넓은 나뭇잎이 뚝뚝 떨어져 내려 고즈녁..

춘궁동 절터 / 백제 절터에 웅장한 고려 탑

춘궁동 절터 백제 절터에 웅장한 고려 탑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백제 역사 한편에 묻혀있는 절터를 찾아 춘궁동에 갔다. 서울 둔촌동에서 광암정수장을 지나서 하남으로 가는 고개를 넘어서면, 왼쪽으로는 삼국시대에 쌓은 '이성산성' 안내판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춘궁동 동사사지'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고골 낚시터 뒤로 돌아 구리 판교 외곽도로 굴다리 밑으로 통과하면 춘궁동 절터가 있다. 지금은 다보사란 새로 생긴 절이 춘궁동 절터에 있다. 1980년대 춘궁동 절터를 발굴할 때 여러 점 동사명(棟寺銘) 기와가 백제 토기와 같이 출토되어, 이 지역이 '동사'란 절이 있었던 절터로 추정하였고, 이 지역이 백제 위례성이니 백제 절터로 추정하고 있다. 탑 주변은 개망초가 하얗게 피어 절터를 더 아름답게 하였다. 오층 석탑..

월산대군 묘 / 조선시대 대표 대군 묘

월산대군(月山大君) 묘 조선시대 대표 대군 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2009.7.25) 원당에서 낙타고개를 넘어 고개를 다 내려가기 전에 오른쪽 야산에 월산대군 묘가 있다. 차가 다니는 길가라서 시끄러워 자연을 벗하며 살았던 월산대군에겐 맞지 않는 자리가 되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으로 세자의 자질은 있었지만 성종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계책으로 왕이 되지 못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성종은 형을 위해 덕수궁을 지어주고, 월산대군은 자연을 벗 삼아 은둔하며 풍류를 벗하고 지냈다. 대군의 묘답게 터는 넓고 봉분은 왕릉처럼 커서 호방하다. 비각에 들어간 신도비는 오백 년 세월의 연륜을 담아 퇴색되었지만 육중하다. 비문은 임사홍이 지었으며, 비명은 전서체로 썼는데 부드럽고 월(月)과 산(山)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