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역사와 문화가 있는 풍경/고궁 능묘 산사 76

공양왕릉 / 고려 마지막 왕의 초라한 모습

공양왕릉(恭讓王陵) 고려 마지막 왕의 초라한 모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2009.7.25) 고양시 왕릉골에는 고려 34대 왕이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그의 비 순비가 묻혀 있다. 공양왕은 신돈의 후손으로 이성계가 형식상으로 옹립한 초라한 왕이었다. 이미 원의 간섭으로 지위가 초라해졌고,조(祖) 종(宗)이 아닌 왕(王)으로 이름이 초라해졌고, 실권은 혁명세력으로 넘어가 왕조를 청산하기 위한 허울만 남은 왕이었다. 시키는 대로 공손하여 공(恭)이고, 왕의 자리를 모양만 사양하는 양(讓)이어서 공양왕이었던 모양이다. 조선을 건국한 후 삼척으로 옮겼다가 2년후 죽었다. 이미 망한 나라의 왕을 누가 제대로 가꾸기나 하였겠는가. 홍살문이나 정자각은 생각도 안 했을 테고, 석물도 단출하여 사대부 무덤과 같다..

회암사터 / 장엄한 옛 영화가 묻힌 동방제일 절터

회암사터 장엄한 옛 영화가 묻힌 동방 제일 절터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2009.7.11) 천보산 산행을 다녀오며 처음 보았던 회암사터는 경이로웠다. 사극에서나 들어보았던 최고의 사찰 회암사는 비록 빈터였지만 만여 평 절간 주춧돌과 남은 석재만 봐도 최고의 불교 본찰다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동방 제일이요 중국에서도 이렇게 아름답고 큰 사찰이 없다 하였을 정도로 넓은 가람 규모에 압도된다. 세 번째 찾아가는 이번엔 더 가까이 가 보고 싶었다. 섬돌에 남아있는 태극문양, 갈기를 휘날리며 구름 위로 나는 천마 문양이 있는 주인 모르는 부도, 짝 잃은 당간지주, 송진을 놓고 밤을 밝혔을 정료대, 물을 담았던 큰 돌 물통, 정연하게 쌓은 석축과 계단의 모습이 장엄하였던 옛 영화를 읽게..

광릉 / 광릉내 숲향이 가득한 왕릉

광릉(光陵) 광릉내 숲향이 가득한 왕릉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009.7.11) 동구릉 탐방을 마치고 포천 쪽으로 길을 잡았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돌아가다가 여덟 밤을 머물렀다는 팔야리를 지나 광릉내로 들어섰다. 세조가 생전에 이 숲에 반해 30만 평 산림을 자신의 능역인 '광능내'로 조성하였고, 그 뒤로도 그린벨트로 보호하여 오늘날 아름다운 숲으로 유지하였다. 광릉 숲길부터 예사롭지 않았는데 광릉에 들어서니 하늘로 뻗은 울울창창한 숲에서 숲향이 짙다. 싱싱한 숲향에 폐부가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 부근에 다다르니 양쪽 능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짙푸른 초록이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다. 능은 정자각과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언덕에 자리 잡고, 그 언덕은 ..

동구릉 / 조선왕릉으로 처음잡은 터

동구릉(東九陵) ① 조선왕릉으로 처음 잡은 터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2009.7.11) 동구릉은 태조가 후손의 유택으로 터를 잡기를 고심하다가 길지로 낙점하고 터를 잡은 곳이다. 이 터를 잡고 난 뒤 유택에 대한 근심을 잊어버렸다 하여 동구릉 터를 보았던 고개를 망우리로 이름 지었다는 얘기가 있다. 예나 이제나 묘터 잡기는 고심해야 할 큰일이다. 동구릉은 이전에 비공개능이던 숭릉과 목릉을 마저 공개하고 있어 한 바퀴 둘러보려면 두세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 목책으로 막아 정자각(丁字閣) 위로 더 올라갈 수는 없지만 최근 개방한 목릉(선조,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은 둘러볼 수 있도록 하였다. 북한산맥의 정혈(正穴)에 해당한다는 건원릉(태조릉)은 높은 좌대에 앉은 듯 위세가 당당하다. 봉분에다 억새를 ..

홍유릉 / 조선의 마지막 왕릉

홍유릉(洪裕陵) 조선의 마지막 왕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경춘국도를 타고 가다가 구리를 지나 남양주시청 못 미쳐 금곡동 오른쪽에 홍유릉이 있다. 사람들이 금곡릉이라 많이 부른다. 왼쪽에 있는 홍릉은 조선 26대 왕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 씨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유릉은 조선 마지막왕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민 씨와 순정효황후 윤 씨가 잠들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요,조선의 최초의 황제릉이기도 하다. 조선이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하고 왕도 황제로 불러서 능도 그 격에 맞게 황제릉으로 조성을 한 것이다. 서오릉, 동구릉, 헌인릉 등 서울 주변 왕릉과 달리 능을 화려하게 꾸미고자 하였으나 석물은 이국적이고 부자연스럽고 표정이 딱딱하다. 통상 다른 왕릉은 재실이 작고 소박하게 꾸몄는데, 홍유릉..

서오릉 2. 예종,숙종,인형왕후가 묻힌 능

서오릉 2 예종, 숙종, 인현왕후가 묻힌 능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사적 제198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2008.12.20) 서오릉엔 지체 높은 왕족들이 묻혀 있지만 왕릉 조성을 주관한 세조나 숙종은 왕릉을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을 경계하여 소박하게 조성하려고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후대에 내려오면서 묘역이나 봉분, 정자각도 작아지고, 석물 숫자도 제한하고, 호위하는 석호(石虎)나 석양(石羊)도 실물에 가깝게 작아졌다. 왕릉 옆 비각엔 묻힌 자의 직위와 내력을 기록해 두었는데, 특이한 것은 비를 세운 때가 병자호란 수년 뒤였는데 명나라 마지막 왕인 숭정(崇禎) 연호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청이 쳐들어온 이듬해인 1937년 1월 추운 겨울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

서오릉 1. 장희빈,숙종의 비,영조의 비가 묻힌 곳

서오릉 1 장희빈, 숙종의 비, 영조의 비가 묻힌 곳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사적 제198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2008.12.20) 서울 서쪽과 고양시가 만나는 곳에 서오릉이 있다. 햇볕 따스한 고을이라 고양(高陽)이라 이름을 얻은 것이 조선 태종 때이니 800년이 다 되어 온다. 창릉 익릉 명릉 경릉 홍릉 5기의 왕릉이 서울 서쪽에 있다 하여 서오릉이다. 조선 왕실 묘는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을 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 원은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빈, 빈의 무덤이고, 묘는 제빈, 왕자, 공주, 제군 등 무덤을 일컫는다. 조선 27대 왕의 무덤은 왕과 왕비, 추존왕 무덤까지 44기인데,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다음으로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서오릉이다. 세조 때 원자였던 큰아들..

고달사터 / 빈터 천년에도 당당한 위엄

고달사터 빈터 천년에도 당당한 위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2007.12.8)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고달사(高達寺)는 사방 30리나 되는 사찰이었다. 터는 논밭으로 변하고 석물은 흩어졌지만 그 면모를 짐작할 수 있고, 향불이 꺼져 천년이 흘러도 뛰어난 문화재가 있어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크고 잘 생긴 석불 대좌에서 존재하지 않는 불상의 크기를 짐작하고, 울퉁불퉁 부도비의 귀부(龜趺)와 이수(이首)에서 늠름한 기상을 엿본다. 거북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땅을 박찰 듯 발끝이 억세며, 이무기는 하늘을 휘감듯 몸을 꿈틀거린다. 산 중턱엔 나라에서 제일 큰 부도가 앞을 막고 서 있는데 빈터를 천년이나 지키고 있는 당당한 위엄에 또 압도당한다. 고달사터 고달사터 발굴 현장 석불 대좌(보물 8호) 원종대사 부도..

봉업사터 / 고려태조 진영을 모셨던 절터

봉업사터 고려 태조 진영을 모셨던 절터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 (2007.11.24) 중부고속도로 일죽 IC를 빠져나와 안성으로 가는 길 2.2㎞ 지점에 봉업사터가 있다. 주변이 논밭이고 축사여서 절터인 것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석물이 흩어져 있어서 절터인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창건과 폐사의 기록은 없지만 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신 절이었다고 한다. 소박하면서도 검푸른 이끼 낀 당간지주가 앞에서 자리하고 있고, 석탑과 석불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서 넓은 가람의 배치를 일러주고 있다. 당간지주 뒷편 5층 석탑은 우묵하게 우뚝 솟아 위용이 있다. 조성 시기로 보아 고려 중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서 낮은 구릉을 돌아 오른편으로 넘어가면 소박한 삼층석탑이 있고 그 뒤로 세월의 풍파로 마모..

경희궁 / 조선 후기 이궁

경희궁(慶熙宮) 조선후기 이궁(離宮)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2007.6.8)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이었다. 1623년 광해군 때 지은 궁으로 서궐이라 불렀다.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조 이후 철종까지 10대에 걸쳐 임금이 머물렀는데 영조의 치세는 이곳에서 절반 이상을 보냈다. 당초 100여 동 건물들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 후 궁궐터를 헐고 학교를 만들면서 경희궁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서울시에서 복원하여 2002년 개방하였다고 하나 경희궁 뒤뜰은 아직 동네축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적 정문엔 문화유적에 대한 예의도 없이 음료수회사 차를 세워놓고 들어가는 등 문화유적 복원에 더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