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글곳간/세상 이야기 58

어느 농사꾼의 집

어느 농사꾼의 집 충남 아산시 염치읍 (2016.6.12) 아산에 있는 영인산(364m)에 갔다가 농사꾼 선배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등목을 하고 시원한 수박을 먹었다. 외손자가 올 때 물릴까봐 모기를 없앤다는 구문초를 심었는데, 이따끔 날파리는 있다며 파리채를 들고 주변을 주시한다. 나무들이 집을 에워싸서 숲이 울창하고, 몇 년마다 하나씩 구하여 마당에 심은 귀한 나무들은 주인의 정성으로 윤기가 난다. 집 앞에는 얕은 냇물이 졸졸졸 흐르고, 오리떼가 헤엄쳐 다니며 먹이를 찾는다. 오래 전 선대부터 살아온 집 바깥 채 널문은 낡을대로 낡았지만, 농기구는 전시물처럼 가지런하다. 선배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40여 년 전부터 주말에는 꼭 내려와 농사를 지었는데, 수 년 전에는 퇴직하고서 아예 부부가 이곳에 눌..

강물이 흐르듯 나도야 간다

강물이 흐르듯 나도야 간다 - 한강길 뚝방길 걸어서 1년 수필가 피천득은 세월이 빠르다는 표현을 새색시 시집와서 김장 서른 번만 담그면 할머니 된다고 하였다. 나야말로 아침 저녁 이 강길을 걸어서 출퇴근하니, 한 달이 가고 쌓여 1년이 후딱 지나갔다. 여름날 뙤약볕을 이고, 겨울엔 콧날이 시큰거리며 걸었다. 아침 햇볕이 그립다 싶으면 어느 새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와 있었다. 꽃이 피어서 지고, 잎이 나고 자라는 것을 보며 한 해가 지나기 금방이다. 무상이란 변화한다는 말이니, 한 해 동안 같은 길을 걷다보면 무상함을 알 수 있다. 변화를 생생하게 느끼려면 매일같이 걸어볼 일이다. 1년 내내 거의 같은 시간에 다니니 길에서 만나는 사람도 익숙하고, 새들도 비슷한 자리에서 아침마다 만난다. 넓은 강쪽 버드..

닭 이야기

닭 이야기 내가 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나서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학교가 없어지는 바람에 어린이저금을 모두 받아 중닭을 스무 마리나 샀다. 닭장 아래쪽에는 산짐승이 못들어 오게 판자로 막고 위쪽은 마름모꼴로 된 철망을 둘러쳤다. 그 안에 닭우리는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게 지붕이 있는 송판집을 높게 지어 횃대에는 스무마리가 한꺼번에 올라설 수 있고, 닭둥우리도 짚으로 두어 개 만들고 북더기도 깔아 횃대 한쪽에 걸어 놓으니 닭집 치고는 제법 잘 지어 놓은 편이다. 학교 갔다오면 터밭에 남은 푸성귀를 넣어주거나 산에서 아카시잎을 뜯어 넣고 벌레를 잡아 넣기도 하였다. 닭은 울어 새벽을 알리고, 알 낳았다고 울어 가보면 따스한 온기가 달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닭이 알을 품..

걸어서 편안하다

걸어서 편안하다 아침 저녁으로 걸어서 출퇴근한지 석 달이 되었다. 하늘을 보고 강물을 보고 풀밭을 보고 걷는다. 한강길과 뚝방길과 동네길을 아침 저녁 한 시간씩 걸어서 간다. 팔은 앞뒤로 가볍게 한다. 아침에는 동으로 저녁에는 서쪽으로 해를 향해 걷는다. 그래서 색안경을 껴야하고 배낭을 짊어지고 등산복이라 늘 산에 가는 차림이다. 아들이 그런다 '아버지 요즈음 회사 안 나가세요?" 사무실에서 입을 옷은 아예 갖다 두었다. 발에서 심장으로 가는 피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발이 제2의 심장이라 한 말을 느낀다. 느리게 가는 차들이 보이고, 철교 위로 지나가는 전철 속 사람들 모습이 차창에 어렴풋하다. 종종걸음 칠 것도 없고, 지하철에 시달릴 일도 없다. 걸어가며 노래를 지어 불러보기도 한다. 지은 노래는 ..

소설가 박완서와 아버지

소설가 박완서와 아버지 맛깔스러운 소설을 쓰는 박완서 선생님이 올해 초 돌아가셨다. 선생님의 이력과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어보면 아버지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동 시대를 살아간 분들이 다 그러한 경험을 하신 분이 꽤 있었겠지만, 나의 입장에 견주어 그렇다는 것이다. 6.25 전쟁이 나던 해인 1950년 박완서선생님은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셨고, 아버지도 그 해에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입학하여 전쟁으로 두 분 모두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전쟁은 모두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일이다. 피난을 가거나 피난을 가지 않거나 가혹한 시기였다. 박선생님 같이 서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겐 암흑과 이별, 몇 달 사이로 피아가 바뀌는 치하에서 지내기란 참으로 두렵고 ..

떡국을 준비하며

떡국을 준비하며 어릴 때 설이 되면 어머니가 바구니에 담아준 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가서 가래떡을 뽑아 왔다. 기계에서 나오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가래떡을 손으로 동강동강 나누어 찬물에 내리는데, 어쩌다 방앗간 아저씨가 잘라주는 가래떡을 받아 먹으면 뱃속까지 뜨뜻하였다. 요즘은 어머니가 매년 보내는 가래떡을 집에서 식구가 같이 썬다. 작년에는 아내가 팔목이 아파 혼자 다 썰었는데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떡국은 설에 먹는 세시음식(歲時飮食)이다. 새해 첫날 밝음과 깨끗함의 의미로 흰떡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신성함이 있고 희고 길어 장수를 의미한다. 육당 최남선이 지은 '조선상식문답'에 보면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습은 상고시대 이래 제사 때 쓰던 음복음식(飮福飮食)에서 유래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설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 서울지하철 2호선에서(2010.12.2) 아침에 사무실에 가기 위해 서울지하철 2호선을 탔다. 나는 짜투리 시간에 책을 펴서 읽고 있었다. 성수역을 지나서 일흔다섯은 되어 보이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어렵게 사는 노인 한 분이 지하철에서 모은 신문을 가지런히 묶어서 어깨에 짊어지기 위해 젊은이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노인은 자세를 낮게 하고 두 청년이 일어나 어깨 끈을 팔에 끼워 드리고, 노인은 무거운 짐을 겨우 등에 지고 난 뒤 출입문 옆 의자 가로막에 기대려고 혼자 얹기 시작하였다. 삐죽 나온 신문이 방해를 하여 쉽게 올려 놓지 못하자 또 다른 청년이 달려와 거들어서 자세가 불안전하지만 겨우 올려 놓았다. 그런데, 노인은 내리지는 않고 계속 짐을 지고 있었다. 나중에 짐을 올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