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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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듣습니다

소가 듣습니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 재상이 아직 벼슬에 들기 전에 길을 가다가 농부가 소 두 마리를 몰고 밭갈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황희가 논뚝에서 농부에게 큰 소리로 물었지요.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합니까?" 그러자 논을 갈던 농부는 일을 멈추더니 황희에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쪽 소가 더 잘 한답니다" 황희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왜 작은소리로 얘기하지요?" 그러자 농부가 말했습니다. "비록 소라도 마음은 사람과 같습니다. 일 못한다는 소가 들으면 불평하지 않겠습니까?" 황희는 농사를 짓는 농부로 부터 훌륭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는 명심보감에서 배웠던 '귀로는 남의 그릇됨을 듣지 말고,눈으로는 남의 잘못을 보지 말고, 입으로는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

제자의 충고와 스승의 아량

제자의 충고와 스승의 아량 조선조 한훤당 김굉필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조광조와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다. 하루는 한훤당 김굉필에게 꿩을 주고 간 사람이 있었다. 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이나 하라고 준 선물이었다. 한훤당은 꿩을 보자 어머니 생각이 나서 털과 내장을 정리한 고기를 햇볕에 말렸다. 그러나 솔개가 날아와 그만 그 꿩고기를 채어가고 말았다. 한훤당은 화가 나서 주의해서 지키라고 당부했던 계집종을 모지게 꾸짖었다. 스승의 노여움이 가라 앉은 후 제자인 조광조가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한다는 정성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게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 반성한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오서 ..

북한산 / 북한산 가운데 자리잡은 승가사

북한산 북한산 가운데 자리잡은 승가사  서울 종로구 구기동 (2007.3.16) 이북5도청-연화사-비봉-사모바위-승가사-구기동 (3시간)    승가봉에서 보는 사모바위가 있는데  승가사 대웅전은 그 사모를 쓰고 있는 형상이다.  북한산 좌청룡 우백호 가운데 승가사(僧伽寺)에 진흥왕이 들렀다 하고승가굴 안에 약수를 세종비 소현왕후가 백약이 무효일 때 마셨다 하고영천(靈泉)과 가양천신(可養天神) 글씨는 추사가 남기고 가고모두 절을 뜻 높게 한다.    승가사 왼쪽 건너에 좌청룡에 자리잡은 바위 형상이  옷을 벗은 여자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부반와형(裸婦半臥形) 모습이라니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겨우 보일듯 말듯 하다.    물개바위(비봉 오르는 길)  비봉(560m)  사모바위   승가사 돌계단     승..

국수

국수(麵)      이번 주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이리저리 국수를 매일 먹었다. 국수가 좋긴 하지만 빈도가 잦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국수라는 말이 등장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도 '제례에 면을 쓰고 사원에서 면을 만들어 판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 국수는 고려시대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국수틀을 사용하였다 하니 대량으로 만들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시내에는 유명한 국숫집이 많다. 혜화동 주변은 국숫집이 모여 있고 맛도 좋아 가히 찾아서 먹을만하다. 문어와 수육도 같이 먹을 수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마포 포이동 대치동 안동국시집은 서울사람 식미에 맞춘 것 같은데 좀 비싼 편이다. 명동에는 김치맛에 곁들여 먹는 칼국수, 시원한 해물칼국수, 얼큰한 즉석칼국수,..

세한도와 의리

세한도(歲寒圖)와 의리 완당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는 국보 180호로 지정된 걸작이다. 푸른 소나무가 있는 외딴집 풍경을 그린 세한도는 160여 년 전 조선 헌종 때인 1844년 완당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자신의 제자인 이상적을 위해 그려주었다.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연경에서 방대한 서적 128권을 구하여 풍랑을 헤치고 절해고도 제주도까지 두 번에 걸쳐 전달하여 김정희의 유배생활을 외롭지 않게 하였다. 김정희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어렵게 귀한 책을 구해준 이상적의 인품을 보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에게 그림으로 답례한 것이었다. 완당은 그림에 붙어있는 발문(撥文)에서 세상의 밀물 같은 권세와 이득에 쫓아가는 세상 인심에..

하숙에 대한 추억

하숙(下宿)에 대한 추억 하숙은 1920년대 초 처음 등장한 말이다. 도시가 생겨나고 유학생과 직장인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로 와서 살면서 생겼을 것이다. 새 학기초 대학교 담장에는 하숙생을 찾는 쪽지를 붙이고 하숙생을 찾고 있다. 요즈음은 합방인 경우 30~35만 원이 최저선인 듯하다. 유학생이 치러야 할 만만치 않은 돈이다. 대학가 하숙촌에도 대학생 보다 직장인이 늘어나고 대학생은 고시촌이나 원룸으로 밀려간다니 향토장학금을 줄여보려는 유학생의 선택일 것이다. 그만큼 하숙집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옛날 하숙집 낭만을 찾기도 어려워졌을 것이다. 내가 하숙할 때만 하여도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인심이 좋아서 친구들이 점심밥 먹으러 수시로 들락거리고, 생일 때에는 돼지갈비 잡채에 포도주까지 차려주었는데 그..

추사 김정희 입춘첩(立春帖)

추사 김정희 입춘첩(立春帖) 6세 어린 나이에 김정희가 그린 그림과 글씨를 보고 무릎을 쳤다는 박제가의 소문은 장안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그러나 김정희의 소문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이자 명신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이었다. 일찍이 영조로부터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정조)의 충신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던 노 재상 채제공은 어느 날 추사의 집 앞을 지나다 대문 위에 걸린 글씨 한 점을 보게 되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대문 앞에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쓴 입춘첩(立春帖)이 내걸려 있었다. 평범한 넉자의 글씨였으나 그 글씨의 뛰어남을 본 채제공은 평소 김노경의 가문과 대대로 좋지 않게 지내는 사이였으면서도 특별히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김정희의 부친인 김노경에게 그 글씨의 주인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