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역사와 문화가 있는 풍경 424

녹우당과 비자나무숲 / 해남 윤 씨 종가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⑩ 녹우당과 비자나무숲해남 윤 씨 종가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2020.1.14)  녹우당 (해남 윤 씨 종가). 은행나무는 1516년에 심었으니 500년이 넘었다   해남 가학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해남 윤 씨 종가 녹우당으로 향했다.  해남읍에서 대흥사 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길 왼쪽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 간판이 보인다. 너른 들판에 간판이 없다면 그 안에 고택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綠雨堂)인데, 집 뒷산에 우거진 숲이 바람에 흔들리면 쏴 하고 푸른 비가 내린 듯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왕세자 때 사부였던 고산 윤선도(1587-1671)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주었다. 효종이 죽자 윤선도는 고..

영랑생가 /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 생가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⑨ 영랑생가'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영랑 김윤식 생가 전남 강진군 남성리 (2020.1.13)     영랑생가  / 전남 강진   영랑생가는 우리나라 대표 서정시인이자 항일 민족지사인 시인 영랑 김윤식(1903~1950)의 생가다. 강진군청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영랑생가가 보인다. 강진 사람들은 영랑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영랑 슈퍼, 영랑 설비 등등, 곳곳에 영랑이 들어가는 이름이 남아 있다. 영랑생가에 들어서면 큰 은행나무가 있고, 겨울이라 앞마당에 모란은 지고 없고, 바로 옆에 그의 명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서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매끄럽고 세련된 시어이고, 그 선은 굵고 강렬하다. 안채로 들어가면 ..

사의재 / 다산 정약용 강진 첫 유배지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⑧ 사의재(四宜齋) 다산 정약용 강진 첫 유배지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2020.1.13)    다산 정약용은 사학(邪學. 천주교)에 물든 죄인이라는 죄명으로 강진에 유배되었다. 그때가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1801년이었다.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조카사위인 황사영 백사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한양으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으나 혐의가 없자 강진으로 유배된 것이다. 아무도 그를 죄인이라고 상대하지 않으려 했는데, 강진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방 한 칸을 마련해 주었다. 그 집이 다산의 강진 첫 유배지가 된 것이다. 그 뒤 1805년에는 강진읍 보은산 고성암의 보은산방으로, 다시 1806년 가을에는 이학래의집으로, 1808년에는 귤동마을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

시 '좋겠다, 마량에 가면'의 그 마량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⑥ 마량에 가서이재무의 시 '좋겠다, 마량에 가면'의 그 마량 전남 강진군 마량면 (2020.1.12)   마량포구 / 전남 강진군 마량면    '좋겠다, 마량에 가면'이란 이재무의 시가 있다. '몰래 숨겨 놓은 애인 데불고 /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며' 하는 글로 시작한다. 누구는 이 글을 로망이라 말하고, 누구는 아주 가지 않으니 다행이라 그런다. 로망을 가지고 있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현실이 글에 녹아 있다. 다음 구절은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 누워'로 이어진다. 강진까지 갔으니, 마량이 궁금하여 마량에 갔다. 마량은..

대구면 고려청자 가마터 / 고려청자 생산 중심지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⑤ 대구면 고려청자 가마터고려청자 생산 중심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2020.1.12)     고려청자는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우리 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에는 400여 기의 옛 가마터가 있는데, 강진군 대구면 부근에만 180여 기가 있다. 이곳은 고려청자 생산 중심지요, 관요가 모여 있어서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상감청자들은 이곳에서 생산한 것이 많다.  고려청자는 철분이 섞인 흙으로 그릇을 빚고, 거기에 유약을 발라 구워서 유약 속에 철분이 청록색으로 변한 자기를 말한다. 이곳에 가마터가 많이 들어선 이유가 있었다. 우선 주변에서 도자기 흙이 풍부하고, 산에서 땔감을 구하기 쉬우며, 가마를 만들만한 적당한 경사가 있는 언덕이 있고, 제품을 운반하는 뱃길이 가깝..

강진 전라병영성 /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총지휘부가 있던 곳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④ 강진 전라병영성조선시대 전라도 육군 총지휘부가 있던 곳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2020.1.12)   강진 전라병영성    전라병영성은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 총지휘부이다. 병영성이 강진에 자리 잡은 것은 조선시대 태종 때(태종 17년. 1417년)이다. 병영성의 위치는 월출산 동남동쪽으로 월출산이나 장흥읍, 강진읍에서 비슷한 거리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목포에서 월출산 아래로 지나가는 2번 국도가 병영면을 지난다. 통영시가 수군통제영이 있어서 통영이 되었듯, 병영면도 병영이 있어서 정한 행정구역 이름이다.  성벽은 1060m로 평지에 세운 작은 성으로 동서남북에 옹성이 있는 성문이 있고, 일부는 적군을 지키는 용도인 치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곳 병마절도사가..

월남사터 삼층 석탑과 석비 / 늘씬,우아한 석탑과 호걸풍의 석비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③ 월남사터 삼층 석탑과 석비늘씬하고 우아한 석탑과 호걸풍의 석비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2020.1.12)※ 중요문화재 월남사터 삼층 석탑 (보물 제298호), 진각국사비 (보물 제313호)      무위사에서 차밭을 따라 2.5㎞ 동쪽으로 가면 금릉 경포대 계곡 입구이고, 거기서 0.5㎞를 더 가면 탑전마을 입구에 월남사터가 있다. 월남사는 고려말 무신정권 때 창건하고, 조선 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본다. 정확한 년도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폐사지에 들어서면 비각이 보이고, 발굴을 하기 위해 판막이를 한 옆에 석탑이 보인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늘씬하고 우아하다. 뒤쪽 월출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더 훤칠해 보인다. 높이 7.4m, 기단 한변은 2m인 석탑..

월출산 금릉경포대 계곡길 / 겨울 계곡도 푸르다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② 월출산 금릉 경포대 계곡길겨울 계곡도 푸르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2020.1.13)      무위사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 2.5㎞에는 차밭이 늘어섰고, 차밭이 끝나는 왼쪽으로 모퉁이 숲에 월출산 금릉 경포대 계곡길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월출산 산행은 천황사에서 도갑사로 가는 종주길을 많이 이용하는데, 경포대 계곡에서 월출산 정상 천황산을 돌아서 내려오면 6.7㎞로 3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짧게 걷는 길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산행을 하지 않고 산 아래에서 가볍게 걷는 길도 몇 곳 있다. 경포대 주차장에서 경포대 삼거리까지 걷는 경포대 계곡길(2.8㎞. 2시간), 도갑사길(도갑사 주차장~자연관찰로. 3.8㎞. 2시간), 정약용 유배길 (사자저수지..

월출산 무위사 / 소박하고 단정한 절집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① 월출산 무위사(無爲寺)소박하고 단정한 절집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2020.1.12)  ※ 중요 문화재극락보전(국보 제13호), 아미타여래 삼존 벽화(국보 제313호), 선각대사 부도비 (보물 제507호),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 내면사면벽화(보물 제1315호)    월출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무위사     무위사는 월출산 동남쪽 강진에 있는 절로 617년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절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바로 앞에 단아한 글씨체로 쓴 월출산 무위사(月出山無爲寺) 일주문이 보인다. 무위(無爲)란 노장철학에서는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는 것인데, 불교에서는 인위에 따라 이룬 것이 아니라 생멸(生滅)의 변화를 떠난 것이라 한다. 보..

국화빵 / 따스한 행복과 추억이 있는 풀빵

국화빵따스한 행복과 추억이 있는 풀빵   국화빵 / 서울 동대문시장 (서울 종로. 2019.12.10)    국화빵은 빵을 금형틀에서 구워내는 국화 모양 풀빵이다. 밀가루 반죽을 해서 부어 넣고, 그 속에 팥을 주로 넣지만 호두도 넣고, 단맛을 내기 위해 꿀이나 단 것을 넣어 만든다. 얼마 전 동대문시장에 갔다가 국화빵을 사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추억의 풀빵이다. 종이봉지에 손을 넣으니 온기가 전하고, 입에 넣으니 바삭한 촉감과 따스한 팥앙금이 씹히는 그 식감이 좋다. 따스한 행복이 입속으로 쏙 들어왔다. 사람 얼굴을 보고 '국화빵이다'라는 것은 쏙 빼닮았다는 것이고, '학생을 국화빵처럼 만들면 경쟁력이 없다'는 거나, '내놓는 대책들이 국화빵'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고 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